엑스선 시대: 부인병, 암, 그리고 라듐-온구기
한글 신문에 묘사된 엑스광선은 무엇보다 우선, 신기하고 놀라운 과학 발전의 일환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하는 광선의 능력이 강조되었으며, 더 나아가 ‘시각’과 ‘인식’이란 결국 어떤 현상인가를 질문했다. 엑스선 촬영 이미지들을 실제로 게재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네 속을 안다.”라는 제목하에 백인 남성 두개골 사진을 소개하기도 했고(『조선일보』, 1934.6.19, A13; 이하 신문기사는
Appendix 1 참조), 대학교수나 지식인들의 뇌를 비추어 좌파 성향을 추적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조선일보』, 1928.4.12, A15). “엑스레이에 노출된 백인 여성의 옆 모습”이라는 제목하에 두개골 이미지를 가시화하기도 했는데, “화내지 마세요, 예쁜 소녀. 내가 엑스레이로 당신을 들여다본다 해도”라는 제목은, 여성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남성 중심적 시각을 드러내면서, 일반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조선일보』, 1934.11.6, A14).
대중을 계몽하기 위한 기사에서 엑스광선은 전례 없이 성공적인 의료 혁신의 대표적 예가 되었다. 엑스레이는 청진기를 통한 청진법보다 더 효과적이었으며, 폐, 기관지, 림프샘, 흉선 등 거의 모든 장기와 골격계의 질병을 진단함에 있어, 내재된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엑스레이는 만병통치약이 된 것이다. 발진, 만성 습진, 무좀, 여드름, 겨드랑이 냄새, 음낭, 냉증, 상처, 편도 비대, 백일해, 복부 결핵, 자궁근종, 자궁암(및 위, 유방, 직장암 등 모든 종류의 암), 그리고 생리통을 치료할 수 있다고 소개되었으며 뼈의 결핵, 임질로 인한 근막염, 치핵염도 엑스광선으로 치료 가능하다고 보았다(『조선일보』, 1938.4.15, A17). 신문의 Q&A 섹션에는 “많은 땀”이나 겨드랑이 냄새를 치료하고자 하는 일반인들의 질문이 종종 포함되었는데, 질문을 받은 의사들은 “엑스레이를 쐬거나, 즉시 피부 절제술을 받으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조선일보』, 1933.6.22, A3). 신속한 치료는 방사선의 큰 장점이었다. 의사 김성진은, 18세 여성 환자가 왼쪽 겨드랑이 아래 직경 약 3 cm의 큰 덩어리로 인해 한 달 동안 불편을 느끼며 염려하자, 엑스광선을 쏘여 신속한 개선을 도모하라고 조언했다(『조선일보』, 1934.2.14, A12). 털이 많은 얼굴을 걱정하는 19세 남성도 같은 충고를 들었는데, 이처럼 신문과 잡지 광고에서 엑스선은 의심할 여지 없는 기적의 치료법으로 묘사되었다(『조선일보』, 1934.5.22, A1).
엑스선은 물론, 남녀노소를 차별하지 않고 관통했다. 다만, 1920~30년대의 신문과 잡지 광고를 통해 볼 때, 방사선 치료의 두드러진 응용 분야 중 하나는 부인병이었다. “뢴트겐 [광선]의 조명은 최근 산부인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특히 불임은 방사선으로 치료 가능하다고 보았다. 불규칙적인 월경은 종종 “생리 고통으로 인한 정신 질환”으로도 이어졌는데,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엑스선으로 난소를 제거하자는 주장도 있었다(『조선일보』, 1936.9.18, A16). 또한 뢴트겐 광선은 낙태에 효과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방사선 전문의 이부현은 딸의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한 한 환자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미혼모가 될 딸을 수치스럽게 여긴 어머니는 뢴트겐 광선이 수술 없이 태아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고 문의해 왔다[
6]. 또한 뇌하수체에 방사선을 조사하는 것은 효과적인 피임 방법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건강 전반을 생각할 때, 여성은 엑스광선에 선취적으로 노출되어야 했다. 1936년에 발표된 한 기사는 여성들이 부끄러움 때문에 좀처럼 자신의 건강문제를 타인과 의논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면서, 생리불순을 조기에 치료할 것을 권유했다. 여성들의 불규칙적인 생리는 임신 문제를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소녀일 때부터, 방사선을 쪼여, 월경 관리를 해야 했다(『조선일보』, 1936.9.20, A20).
엑스광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암 치료였다. ‘암’이라는 질병 이름이 정확히 언제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의료 전문가들이 부상하고 현대적 위생 관념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1930년대에는 ‘암’, 혹은 ‘암종’이 20세기의 치명적 질병으로 대중의학 저술에 자주 소개되었다. 물론 이러한 대중적 인지도의 향상이 암에 대처하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보건/위생 통치 능력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의 신문기사들은 자궁암과 유방암으로 사망한 여류 명사들을 다루기도 했다. 조선 시대 마지막 덕혜옹주(1392~1910년)의 친어머니인 복령당 양씨 부인은 유암(유방암)을 3년간 앓다가 1929년 5월 30일 세상을 떠났다(『조선일보』, 1929.6.1, A18). 숙명여자학교의 설립자이자 여성 교육의 선구자인 이정숙, 역시 유암(유방암)으로 77세에 사망했다(『조선일보』, 1935.5.5, A9). 자궁암 또는 자궁암종이라는 질병 이름도 대중 매체 및 의학저널에 자주 등장했다. 『이적명증』은 1921년 김익도 목사가 부흥 모임에서 수행한 기적 치료의 진위를 입증하기 위해 교육받은 기독교인들이 모여 그 진위를 검증하고 발표한 책이었는데, 이러한 개신교 신유 증명 서적에도 자궁암이 불치의 병명으로 기록되었다[
7].
1930년대, 자신의 유방암을 염려하는 한 젊은 여성의 신문사 투고 편지는 당대의 불안을 반영한다. 28세의 그 여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유방암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암에 대한 염려를 표출했다. “유암이란 유전병 임니까. 이십 팔 세 여자입니다. 상시로 복통이 잇스며 수족이 냉합니다. 복통이 심할 때에 유부 좌우에 맛치 제 대의 고물이 잇고 유부가 압흐며 좌우 딸[팔]까지 저립니다. 지방 한의에게 진찰을 바더 본 즉 냉증으로 그럿타 하오나 소생의 모친이 유암증으로 별세 하엿습니다. 유암증이 확실할 시엔 처방이 엇더하며 복약으로 완치할 수가 엇습니까. 수술이라야 됨니까 복약전치(服藥全治)가오되면 처방을 하교하시고 유암증진부의 판척법을 하교 하시오.” (『조선일보』, 1932.5.13, A11) 환자의 질문은, 난치병이 유전될 수도 있다는 가족력에 대한 두려움, 외과적 수술치료에 대한 불편함, 복수의 의료 시스템하에서 서양 의학 의사의 진단을 신뢰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등 여러 가지 우려들을 드러냈다. 질문을 받은 담당 의사 축자영은 유방암 진단을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수술과 방사선 치료 외에는 유방암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고 충고했다. 또 다른 외과의사인 문인주도 같은 의견을 표명했다(『조선일보』, 1936.3.12, A7).
이렇듯 다양한 질병 치료에 적용된 엑스광선은 물리화학요법(이화학요법)이라는 이름하에 이미 친숙했던, 빛, 열, 전자기의 치유력과 함께 근대식 병원 시스템 내로 조직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엑스선 및 라듐 치료는 현대 일본 병원이나 의과대학과에서 ‘물리치료’라는 범주로 확립되었다. 스 린 로(Shi Lin Loh)에 따르면 일본 의료계에서 물리치료는 온천 목욕, 자외선 노출, 전기치료(예를 들어, 히스테리를 치료하는 전기충격요법) 등을 포함했다[
8]. 한글 신문의 기사들도 비슷했다. 엑스선 및 라듐 치료는 태양광선 및 전기 치료와 본질적으로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1926년 6월 25일 황해도 지방 병원은 태양광선 및 엑스레이 치료를 동일한 공간에서 제공하는 새로운 클리닉을 오픈했다. 태양광선 치료와 병치됨으로써, 엑스선의 ‘자연 치유력’이 강조되었고 심지어 ‘엄청나게 효율적’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조선일보』, 1926.6.25, A8).
라듐의 방사성 효과도 긍정적으로 소개되었다. 신의주, 개성 등지의 새로운 온천 개발자들은 주식 공모에서 적극적으로 해당 온천의 라듐 함량이 높다는 것을 강조했다(『동아일보』, 1938.9.4, A10). 라듐은 말 그대로, 약수, 즉 의학적으로 효율적인 물이었으며 액화된 ‘만병통치약’이었다. 사실, 온천욕의 치료 효과는 한국 전통 의학에서 볼 때,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종기 및 기타 피부 질환, 우울한 기분, 만성 피로와 같은 건강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왕실 가족들은 자주 온천을 방문했다. 물리화학요법의 도입이나 온천욕에 대한 신뢰를 상업적으로 강조한 것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라듐이나 엑스선과 같은 방사성 물질의 치료 효과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문화적 배경이 되어 주었다.
같은 맥락에서 라듐의 치료적 가능성은 가정용 의료 기기인 ‘라듐-온구기’의 형태로 상용화되었다. 광고 전단지는 “치료용 라듐의 새로 발견된 효과는 살과 뼈에 침투한 다음 질병을 유발하는 물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라고 강조했다. 라듐은 신소재였지만 경락을 따라 흐르는 기의 움직임에 열 혹은 압력을 가하여 질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겠다는 생각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이미 익숙했던 의학 지식이었다. 온천욕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습속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보태진 것이다. 물론, 과학의 권위도 획득했다. 광고 문구에 따르면 이 기기는 “일본,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로부터 재판매 특허를 취득했”으며, “수십 명의 의사가 실험적으로 [효능]을 입증하고 [기기]를 추천했다.” (『조선일보』, 1939.8.27, A6)
서구 근대의학의 권위에 기대는 광고 기법은 완전히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로에 따르면 일본에서 생물/의학을 전공한, 자격증을 갖춘 의사들은 새로운 물리치료법에 관심을 표했다. 1914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 따르면, 의사들은 통증 조절을 위해 엑스선과 라듐을 시도했으며, 한 일본인 의사는 1914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에서 나병 치료로 인한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환자들에게 라듐 복용을 권장하기도 했다[
9]. 라듐-온구기에 대한 한국어 광고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동승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광고에 소개된 의사들은 라듐의 효능을 높이 평가했으며, “[피부가] 타지 않고 흠집이 없는 이상적인 가정용 치료법”이라고 소개하며 기구의 구매를 독촉했다. 물론 이럴 때, 라듐-온구기는 만성 위장 장애, 폐 질환과 더불어 ‘냉증’을 포함한 대부분의 부인과 질환을 가장 잘 치료했다(『조선일보』, 1931.2.21, A4; 『조선일보』, 1931.11.20, A5).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라듐-온구기의 광고는 근거가 빈약한 과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상에서 사용 가능했던 이러한 소규모 가정용 의료 기기 광고의 증가는 고가의 엑스선 기계 수입이 정점에 이르던 시기와 병행했던 현상들이다. 1930년대 조선은 방사선 관련 전문 인력의 증가와 함께, 일반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일상생활에 유용할 듯한 의료 기구들을 판매했다. 이러한 방사성 물질의 일상화는 일반 여성 소비자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치유하는 힘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간단하고 빠르게, 집에서, 그리고 [남성]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보일 필요 없이, 개인적인 치료 수단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라듐-온구기가 결국 만성적 건강문제를 가진 여성들에게 희소식이 될 거라는 광고 메시지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낸 전략이었다. 1930년대 조선의 여성들은 최첨단 엑스선 기계의 제조, 구매, 제어의 역사에서는 소외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녀들은 분명, 최첨단 의료 문화의 주요 소비자이자 방사성 물질에 순응하는 잠재적 환자로 호명되었다.
방사선 재해와 여성 환자, 그리고 순교 서사의 구성
발견 초기부터 엑스선의 해로움은 자명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출판된 영미권 의학, 간호학 관련 저널들은 자주 엑스선의 부작용들을 논의했다. 1930년대 한글 인쇄 매체들도 “살인광선” 혹은 “괴광선” 이라는 이름하에 엑스선의 치명적이고 부정적인 성능들을 보고 했다. 전문가들(radiologists) 역시 1930년대에 이르면, 방사선과 관련된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의제화하고 규제를 촉구하는 논문들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조선뢴트겐협회의 저널 제1권에서는 일본인 방사선학자이자 1세대 조선인 방사선학자들을 길러낸 것으로 유명한 스즈키 모토하루(鈴木元晴)가 방사선 재해 예방에 대해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했다. 조선뢴트겐협회는 엑스선 재해 예방을 중점 연구 주제로 다뤘으며, 스즈키는 저널 제3권에서도 국제 뢴트겐 재해 방지법을 소개했다. 스즈키 자신도 과도한 방사선으로 인해 손가락을 절단할 정도로 심각한 장애를 겪었다[
1]. 전문가들 사이에서, 엑스선 재해 예방은 환자들뿐 아니라, 방사선 전문의들 및 기사, 임상에 임하는 의료진 모두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였다.
조병희가 1937년 조선뢴트겐협회지에 보도한 한 일본인 환자의 방사선 재해 관련 소송은 저널 전체를 통틀어, 전문가들이 아닌, 여성 환자의 경험을 상세하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 소송은 여성 환자의 가정생활과 재정적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방사선 관련 의료 과실이 신체에 어떤 손상을 입혔는지도 자세히 소개했으며, 방사선 의학자, 기사, 간호사, 병원 관리자들의 책임 소재를 판단하는 과정들도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10]. 물론, 이 특별한 소송이 1930년대 일본 여성 환자, 전체를 대표하는 사례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해방 후, 한국방사선학회의 공식 역사를 회고할 때도 언급되었고 방사선 재해에 대한 ‘순교서사’를 구성하는 데도 포함되었다. 구체적 내용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50세의 일본인 여성 고바리 킨(小張 キン)은 다섯 자녀를 둔 어머니이자 남편의 국수 공장을 함께 운영하던 평범한 주부였다. 내원하기 전, 고바리는 한 달 동안 아이들을 돌본 후 피로를 느꼈지만 심각한 질병 없이 건강했다. 갑자기 하복부에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명확한 진단명은 요원했다. 마츠야마 병원에서 몇 주 동안 재택 치료와 입원 치료를 받은 후 고바리는 퇴원을 원했고, 의사인 마츠야마 리쿠로(松山陸郞)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환자는 항상 제멋대로다. 조금만 나아지면 병원을 떠나고 싶어 한다”며 고바리의 주체적인 판단을 못마땅해했다. 마지못해 환자 고바리의 퇴원을 허용한 마츠야마 리쿠로는 고바리에게 퇴원 전, 이틀 동안 총 5회에 걸쳐 방사선을 쐬도록 처방했다. 방사선 노출의 목적 및 빈도 등에 대한 추가 설명은 제공되지 않았다. 1930년 8월 21일과 22일, 고바리는 1회 3, 4분에서 10분 동안 지속되는 총 5회의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정확한 투사량은 소송 문건에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10].
엑스레이 치료 열흘 후인 1930년 9월 1일, 고바리의 허리 윗부분, 즉 척추 양쪽에 동전 크기의 보라색 반점이 나타났다. 그녀의 통증은 가중되었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긴급한 상황에서 고바리는 인근 병원에 치료를 요청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같은 해 9월 19일, 마침내 고바리는 다른 의사로부터 과도한 엑스레이 촬영으로 인한 궤양 진단을 받았다. 다음 날 마츠야마 병원에서 진단이 확정되어 고바리는 일련의 수술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다음 해인 1931년 4월 중순, 그녀는 일본 적십자 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고 그곳에서의 치료 후, 1932년 1월에야 퇴원하게 되었다. 방사선의 직접적 조사는 엑스레이 기술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고바리는 병원장 마츠야마 요타로(松山陽太郞)와 적절한 감독 없이 방사선 치료를 처방한 의사 마츠야마 리쿠로를 고소했다. 환자인 고바리에게 이자 포함 총 4,886.76엔의 보상금과 소송 비용을 지불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10]. 당시 일본인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5~1.8엔 정도였다.
예외적인 사례지만, 고바리의 소송 건은 관련 의료진이 치료 방사선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을 때 [여성] 환자와 그녀의 가족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필요한 신체적, 심리적, 재정적 손해를 여실히 드러냈다. 실망스럽게도 고바리의 사례는 기각되었고, 기각의 이유는 조병희의 보고서에 실려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기의 보고서는 “일반적으로 의사가 방사선을 조사할 때 환자의 피부 표면이 건강한지 여부와 최근 다른 부위에서 방사선을 조사했는지 여부를 검사해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을 어긴 사례였다. “하루 또는 몇 주 정도의 합리적인 간격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4], 고바리의 의사였던 마츠야마 리쿠로 및 방사선 기사는 그런 점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고바리 사건은 어느 정도로 예외적인 사건이었을까? 당시 일본의 엑스선 사고 관련 정확한 정량적 분석은 본 고의 연구 범위를 넘어선다. 하지만, 기존의 문건들 내에서도 재해와 사고는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조중삼은 “1940년대까지만 해도 엑스레이 장치가 방전을 방지할 수 있는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치료 중 고압 감전으로 환자가 사망했고, 이로 인해 소송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4]. 1970년대 한국 방사선 전문의의 회고를 통해 1930년대 의료용 방사선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사고들의 흔적이 드러난 것이다.
환자와 더불어, 전문가들의 만성적 재해도 보고되었는데, 방사선 의학자들의 회고에서, 이들은 주로 숭고한 희생자로 묘사되었다. 조중삼의 “만성 직업성 방사선 장애”에 따르면, 적지 않은 의료인들이 만성 엑스선 피부염으로 고통 받았는데, 그중 총 10%~28%는 암으로 전개되었다. 방사선 피폭에 노출되었던 엑스선 기사들의 예를 살펴보자. “해방[1945] 전 북한 사리원도립병원, 철원도립병원, 평강 결핵요양원에서 방사선 기술자로 일하던 박승준은 무좀 치료를 목적으로 반복적으로 방사선을 발에 조사했다. 결국 발에 만성 피부염이 생겼고, 1945년 이후 청주도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피부암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회복하지 못하고 다리가 절단되었다. 195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 또 다른 기술자인 고흥규는 용산 철도 병원의 방사선 치료실에서 근무했는데, 업무를 시작한 지 9년 후인 1954년, 왼쪽 발에 피부염이 발생했고, 피부암과 백혈구 수 감소로 악화되었다. 여러 차례 절단 수술을 받았지만 암이 복부까지 전이되어 결국 1957년에 사망했다. 감정 어린 어조로, 조중삼은 두 젊은 의료진의 비극적 죽음을 묘사했다. 조중삼은 피부염 외에도 장기 손상과 관련된 다른 알려지지 않은 사례가 많았음을 언급했는데, 이는 의료 전문가들 사이에서 익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조중삼 자신도 5년 동안 직업적 방사선 노출로 인한 백혈구 수 감소로 고통을 겪었다[
4].
조중삼은 방사능 재앙을 과학 발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희생이자 순교의 일환으로 이해했다. 그는 역사에서 영웅주의를 믿지 않았던 스즈키 교수가, 스즈키 자신의 스승 장례식에서 감동 받았던 일화를 소개했다. 방사능에 의해 훼손된 스승의 시신은 인류 공동의 선, 과학 지식의 확장을 위한 헌신으로 해석되었고, 스즈키는 스승의 장례식에서 진정한 휴머니즘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연구와 치료를 하다가, “방사선 장해로 만신창이 된 내 육신마저 학문을 위해” 내어 주고, 방사선이 축적되어 사망한 사람들은 “생명을 희생하면서 국민국가를 보호”하고 “[방사선학자]의 미래 세대에 대한 사랑의 화신이 된” 사람들이며 진정한 영웅이었다[
4].
독일의 관행은 ‘순교/희생’ 관점을 강화했다. 조중삼에 의하면, 1936년 독일 방사선학회는 함부르크 세인트 조지 병원 앞마당에 방사선 재해로 사망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아울러 1937년에는 방사선 재해의 희생자로 확인된 169명의 의료진을 기록한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사망자는 46명의 프랑스인을 필두로 유럽과 미국 및 총 15개국 출신들이었다. 조중삼에 따르면, 1959년 출간된 이 책의 제2판에는 총 360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의 역사, 성취도, 장애 정도, 경과 등이 자세히 묘사되었다. 조중삼은 독일의 사례를 예로 들며 명예로운 희생자 명단이 대한민국에서도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려한 발전의 그늘에는 반드시 숨은 희생이 뒤따른다”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영웅적 희생이라는 내러티브 관점은 방사선 관련 사고와 재난의 궁극적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피해자가 순교자가 되었을 때 책임은 구조나 법률이 아니라, 자원한 개인의 영역이 되어 버리는데,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의 고유성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었다. 조중삼이 소개하는 피해 사례에서, 의사나 방사선 기사가 아닌, 일반 환자의 이름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다. 1919년 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바륨 과다 복용 중독 사례를 언급할 때는, 피해자의 신원도 사고에 책임이 있는 사람도 언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중삼의 회고적 역사 쓰기에서, 고바리의 이름이나 국적이 상세히 언급되지 않고 단순히 “50세 아내” 정도로 묘사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조중삼이 그리는 한국 방사선 치료의 역사, 그 기원에는, 자신의 일본인 스승인 스즈키 및 스즈키의 스승이 존재했고, 방사선 기사 박승준과 고흥규의 희생이 있었지만, 사고로 죽거나 다친 환자들의 이름은 전혀 서술되지 않았다. 오직 숫자로나 인지될 그들의 사례는, 그래도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순교 서사 전체의 희생자 수는 결국 증가하는 것이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일본인 여성 환자 고바리 등, [여성] 환자들의 이야기는 인지되지만, 그 구체적 이름과 사례들은 동시에 지워지면서, 의사 중심의 방사선 재해 역사 서술에서 피상적인 예, 주변부의 이야기 정도로만 활용되는 양상을 보였다[
11].
아울러, 방사선 재해를 다루는 20세기 초 의학 내러티브에는 모호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대중 매체뿐 아니라 방사선 전문의들도 엑스선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인지하고 지적했지만, 그것은 늘 회고시에만 주로 언급되었을 뿐, 엑스선, 혹은 방사선의 근원적인 이중성을 지적하는 시도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1936년 한 의사가 쓴 글은 1936년의 의학적 성취를 신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X선 기계로 치료를 받다 부상을 입곤 했다… 방사선에 대한 지식은 불완전했고 기계에 결함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1936]에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다. 기계 장비는 말할 것도 없고 X선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엑스 선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조선일보』, 1936.9.18, A16). 이러한 안전성에 대한 확신하에 방사선 치료는 산부인과에 특히 유용하다고 선전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방사선 치료의 ‘절대 안전성’은 1960년대의 의학에 의해 공개적으로 비판되었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소속 종양학자 김영제는 “방사선은 빠르게 성장하는 암세포를 강력하게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피부, 위, 상피, 혈구에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치료적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방사선 치료와 화학 요법이 암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 아님을 주장했다(『동아일보』, 1968.8.13, A2). 비슷한 맥락에서 1970년대 국립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X선의 심각한 부작용을 밝히고, 새로운 코발트-60 방사선 원격 치료기를 자궁암 여성에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동아일보』, 1974.2.15, A19). 대부분의 의학적 발전이 그렇듯이, 엑스광선의 유해한 부작용, 적절한 규정의 부족, 전문적이고 숙련된 작업자의 부재, 기계의 불완전함과 감전 및 재해의 가능성은 오직 회고를 통해서만 충분히 묘사되었고, 그렇게 한계가 많았던 과거를 소환함으로써 현재의 발전과 지위를 견고히 대조하려는 의도하에서만 그 부정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1930년대 엑스광선의 ‘절대 안전’에 대한 언설들은 현실을 반영한다기보다, 오히려 글쓴이의 희망과 믿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엑스광선 기계와 미국 간호사들의 전문성
순응적인 소비자 혹은 환자로 방사선 치료를 경험하는 것 외에, 여성들은 엑스선 기계를 통해 전문 의료인으로 부상할 새로운 기회들을 모색하기도 했다. 물론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여성 방사선 기사는 허용되지 않았으며 간호사들이 엑스선 기사로 자격증을 얻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미국 간호사들의 사정은 달랐다. American Journal of Nursing에 실린 논문들 및 오피니언 에세이들은 20세기 초 엑스선 기계/기구로 인해 확대된 간호사의 전문성이 간호의 본질을 재규정하는 문제들을 제기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미국의 경우를 통해 조선에서의 여성 경험에 부재했던 것들, 혹은 과잉 대표된 것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간호사들은 엑스광선의 유해성을 인지하면서도, 새로운 기계가 전례 없는 전문성을 획득할 기회를 열어줄 거라고 기대했으며, 선진적인 과학 지식을 습득하는 일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예를 들어 1921년 켄터키 루이즈빌에서 일했던 한 간호사는, 뢴트겐/엑스광선이 비교적 새로운 현상임을 강조하면서, 방사선의 위험성이 아직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잠재적 위험성 때문에 엑스선 기계 조작에서 간호사들이 배제되었던 적도 있었다[
12]. 루이스 달비(Louise B. D’arby)는 엑스레이 장치들 및 그것을 구비하고 있는 병원 시설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후, “뢴트겐 실험실은 향후 간호사 교육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 엑스레이 실험실에 참여하면 해부학과 생리학 연구를 지속할 수 있고, 가장 최근의 의학/수술 관련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13]. 아울러 간호사 독자들을 위해, 뢴트겐 전문의들이 저술한 교육용 논문들을 수록하기도 했다. 1918년 편집자에게 보내온 편지에서도 한 간호사의 긍정적인 반응은 잘 드러났다. 엑스레이와 관련된 일들은 비교적 쉽고, 편하며 금방 배울 수 있는 지식이었으며 간호사들은 “반드시 이 멋진 기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겸비하고” 있어야 했다[
14].
새로운 기계 및 관련된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의 습득과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이를 통해 간호사 본연의 돌봄 임무가 심화되는 것이었다. 1920년,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의 대형 병원 중 한 곳의 외과의사에게 고용되어, 그 의사의 개인적 실험실에서 일했던 한 간호사는 그녀의 주된 임무가 “위장관 연구를 위한 바륨 공급”이며, 이는 곧, 4 ounces의 바륨을 1 pint의 버터밀크와 잘 배합하여 환자가 잘 취할 수 있게 돕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5]. 20세기 초, 바륨을 이용한 X-레이 검사는 종종 표준 X-레이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상자가 바륨이 첨가된 액체 혼합물 또는 바륨으로 코팅된 음식을 통하여 바륨을 삼킨 후에 X-레이를 촬영하면, 바륨은 X-레이에서는 하얀색으로 나타나 소화관의 윤곽을 드러내 주었다. 이를 통하여 식도, 위, 소장의 윤곽선 및 내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륨은 비정상적인 부위에 모여드는데, 이 역시 궤양, 종양, 폐색, 및 비대해지고 확장된 식도 정맥의 확인을 가능하게 했다. 바륨이 위장과 소장에 도달하게 됨에 따라 관찰되는 음식물의 소화 정도, 그리고, (비)정상 소장에서 어떻게 바륨이 시각화되는지도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인체의 내부를 조망함으로써, 돌봄의 세부적인 계획을 더 확장 시킬 수 있다는 점, 이렇게 재밌고 새로운 지식에 기반해서, 간호사는 간호 본연의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강조되었다.
의사들 역시, 간호사들이 엑스광선 기사로 일하는 것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간호사 본연의 임무가 기계 조작에 숙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의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로 부상했던 엑스광선은, 물론, 의사의 관리하에서 사용되어야 했다. 엑스광선의 진단 및 치료의 범위는 광범위했으며 이러한 가능성은 반드시 다양한 의료 전문가들 사이의 협업을 필요로 했다. ‘정규 간호사(the graduate nurse)’는 진료현장의 협업에 능숙한 최적의 파트너 인력이었다[
16]. 간호사들을 최선의 엑스선 기사로 묘사하기 위해, 그 의사는 환자에 대한 관심과 케어가 엑스광선 기계 조작의 핵심임을 주장했다. 간호 혹은 돌봄의 가치를 모르는 기사들은 단순히 사진을 찍어 실험실이라는 갤러리에 전시할 뿐이라는 것이다. “전미 뢴트겐 광선학회와 북미 방사선학회는 화상 제작 실험실들의 난립을 막기 위해 엑스레이 실험실과 기술자의 표준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진정한 [엑스광선의] 기술자는 병리학적 상태를 제대로 묘사할 줄 아는 예술가가 되어야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런 엑스레이 실험실의 기술자 직분은 간호 전문가들이 차지하게 되길 바란다” [
16].
1920년대의 한 의사가 파악한 엑스광선 기술에 특화된 간호사들은, 일상적인 간호 임무로부터 벗어나, 주 7시간 또는 8시간 근무해야 했고, 가끔씩 긴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요일이나 휴일 근무, 야간 근무에 동원되지 않았다. 엑스광선이라는 전문성 때문에 일반 간호사보다 더 오래 경력을 쌓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엑스선 기술자로 특화된 숙련되고 효율적인 간호사들은 첫째, 정밀하게 전기 장비의 사용법을 배울 수 있는 기계적 적성 및 사진/인화 능력을 구축해야 했으며, 둘째, 간호사로서의 교육과 에티켓을 익혀야 했고, 셋째, 실험실에서 여러 명의 기술자 및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일반적 경영 및 소통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16].
1930년대가 끝날 무렵, 미국 간호사들이 엑스레이 광선 기사로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100병상 아래의 병원 402곳 가운데 184곳의 병원들이 간호사들을 엑스선 기사, 실험실 전문가, 혹은 마취 기사 등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물론, 전원이 다 풀타임으로 고용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병원 184곳, 간호사 총 284명 중, 엑스레이 기사 간호사는 131명, 마취와 엑스레이 기사 둘 다를 전문으로 하는 간호사는 20명, 엑스레이 기사와 실험실 기사 모두 겸비한 간호사는 7명에 달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기술 전문 간호사들은, 기계에 대한 숙련도뿐 아니라, 간호의 본분인 환자 개개인을 다룰 수 있는 인격 및 융통성을 겸비함으로써 진정한 기술/전문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7].
돌보고 소통하는 간호의 본질을 기계 조작의 수월성보다 우선시하던 경향은 1964년의 한 논문에서도 드러난다. 방사선 진단 및 치료 팀에서 간호사의 수월성은, 효과적인 기계조작의 능력보다도, 그가 얼마나 환자 및 환자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가, 환자를 얼마나 최적의 상태에서 방사선 진단 및 치료에 준비시킬 수 있는가, 아울러 어떻게 팀 내에서 의사, 방사선 전문가, 다른 멤버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라는 덕목에 더욱 좌우되는 것처럼 서술되었다[
18].
간호의 본질을 강조하는 큰 틀 내에서 간호사의 새로운 기술 전문성을 수용했다는 것은, 기존의 위계들이 일체 도전 받지 않는 방식으로 기술 전문성이 배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간호사들의 기술 전문성은 반드시 의사의 감독하에 놓여야 했으며, 임상/의료의 기존 위계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엑스광선뿐 아니라, 20세기 초 등장했던 새로운 의료 도구들, 청진기, 모니터, 또는 체온계 등과 그것들을 이용한 간호 행위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기구와 간호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기계처럼, 간호사들이 물화되는 것은 아닐까? 간호의 고유 업무들은 ‘과학’ 혹은 ‘기술’의 언어로 좀처럼 다 번역되지 않는데, 간호 관련 지식들은 주로, 몸을 사용해서, 손으로 하는, 환자의 구체적인 상황 혹은 개별성과 대면 소통하면서, 구전적인 지식에 근거하면서, 심지어 환자 중심의 의료 기록에서 조차 비가시화되는 노동인 경우가 많은데, 새로운 도구는 간호사의 손과 몸을 단순히 기계의 연장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비대면, 비인격, 정량화된 노동으로 치환된 간호는, 의사 또는 다른 임상 전문가들에게 더욱 종속적으로 복무하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간호사들은 돌봄의 독자적인 영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계/기구들을 활용하게 될 것인가?
1920~30년대 미국의 간호사들은, 손에 쥔 새로운 기구들로부터 최선의 임상 결과를 얻어 내려 했다. 하지만, 그 돌봄의 손이 누구의 것인지, 기계인지, 그 뒤의 인간인지에 대한 질문들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 미국간호협회(American Nurses Association)의 회장이었던 클라라 노이에스(Clara Noyes)가 말한 것처럼, “어떤 순간에는 간호사의 두뇌가 필요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그녀의 손만 필요하며, 또 다른 순간에는 두뇌와 손 모두가 필요하고, 그리고 또 다른 순간에는 두뇌도 손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19]. 간호의 실행과정에서 기계와 기구라는 새로운 물질성은 늘 간호사들의 몸/노동과 더불어 존재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몸의 일부가 어떻게 기구와 결합하여 임상에 가장 적합하게 쓰여야 했는지는 오직 상황에 따라 결정될 뿐이었다.